시간과 구조와 터로 나타난 문명사적 비전
그리고 「시간의 복원」은 시간에 대한 인식론의 형태를 취한다. 즉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은 시간의 실체를 부여해줄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의식과 관련되는데, 작가는 이를 일종의 유사고고학적 발굴 프로젝트를 감행함으로써 실현한다. 고대 유적의 발굴 현장을 그대로 재현함으로써 이미 흘러가버린 시간,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복원한 것이다. 여기서 시간은 문명을 증언하는 흔적으로 표상되며, 이로부터 폐허화된 문명의 잔해와 대면한 것 같은 멜랑콜리와 노스탤지어를 환기시킨다.
이와 달리 근작의 「시간비행」과 현 전시 주제인 『시간 여행』에서는 말 그대로 시간비행 혹은 여행을 감행한다. 이를 위해 작가는 원형의 구조물을 만들고, 비행기나 아톰으로 하여금 이 구조물을 통과시킨다. 여기서 그 속이 뚫린 원형의 구조물은 블랙홀(시간을 집어 삼키는)이나 화이트홀(시간을 뱉어내는)을 연상시키는데, 그 자체를 일종의 타임홀(시간의 축)과 동일시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이런 블랙홀이나 화이트홀 그리고 타임홀은 물리적인 현상에만 해당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의식 속에서 모든 기억이 깡그리 지워져 멍해지거나(망각), 이와는 거꾸로 온갖 기억의 편린들이 마구 쏟아져 나와 걷잡을 수 없게 만드는 일종의 패닉상태를 경험한다. 바로 기억이 사라지거나 불현 듯 출현하는 마음 속 블랙홀이며,
화이트홀이다. 그리고 형태면에서 전작과의 차이점은 구조주의적 환원이 보다 의식적인 층위에서 적극적으로 행해지는 것이다.
특히 미니멀리즘을 연상시킬 만큼 그 표면질감을 군더더기가 없이 심플하게 처리한 근작에서 고유의 구조적 특질이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이러한 성질은 대리석재를 소재로 한 일련의 작업들에서 더 뚜렷하게 부각되는 편인데, 아마도 단일의 재료나 색감 그리고 질감이 주는 통일성 때문일 것이다.
작가 임승오의 작업들은 시간에 대한 인식론과 함께 인문학적 배경이 갈려있다는 점에서 하나로 관통할 수 있다. 시간에 대한 인식론의 다양한 지점들을 씨실과 날실삼아 긴밀하게 직조해낸 것이다. 그리고 이는 근작에서 주로 발굴 이미지와 터 이미지로 나타나며, 때로 신전이나 관문 이미지 그리고 일종의 타임홀의 형태로 현상하기도 한다.
이로써 시간과 구조와 터의 개념을 매개로 한 문명사적 비전을 예시해주고 있는데, 그 자체가 생태 개념과 강하게 연동된 것으로 보인다.
이 타임캡슐과도 같은 유적들에는 사람의 흔적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이따금식 동물들이 어슬렁거리거나 때로 사람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그 동물들이나 사람들은 유적으로 상징되는 문명의 일원으로서보다는, 오히려 문명의 전면적인 파국을 마주하고 목격한 최후의 증언자처럼 보인다. 이렇듯 문명이 파국으로 맞을지도 모른다는, 해서 지구로부터 인류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경고성 메시지에 힘입어 작가의 작업은 그 외연이 생태담론으로까지 확장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