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
가상의 현실
구조적 현실
혼성 조우
7회 개인전에서 보여진 ‘혼성조우’ 라는 주제는 현재까지 본인이 다루어 왔던 상상, 공감, 낭만, 구조적, 구성적 등의 모든 표현양식들의 ‘혼성성’들을 모아 시각적 공간에 함축적으로 작품화 하였으며
‘무엇’ 과 ’무엇’이 전시공간 안에서 만나게 하거나 현실세계에서 ‘조우’시키는 작품들을 발표하여 ‘물질적 조우’ 뿐만 아니라 미술사적 사상들의 조우를 통하여 여러 객체들 간의 만남에서 보여지는 ‘알레고리'를 표현하였으며 형식적으로는 ‘메스’라는 단일의 형태에서 혼성적이며 다의적인 의미로 조각을 확장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겠습니다. 8회 개인전의 ‘Gentleman’은 이전의 작업들의 결합된 형태에 의인화된 개체를 등장시키며 작품을 구성하며 스토리텔링을 통해 작업화 하고 있다.
나는 작업에서 무엇을 이야기하려 하는가?
미니멀함과 혼성적 결합을 을 지향하고 그것을 ‘구조’ 라는 맥락 안에서 표현하려 하지만 작업적 결론은 찿기는 힘들다. 그러함에 인간의 현실, 현재 나의 모습을 표현하는 또 다른 방면으로 이질적 형태와 수많은 현상들을 ‘조우’ 시키고 있다 . 즉 이미 나에겐 ‘미니멀함’은 과거의 형태로 인식되고 있으며 수많은 작가들과 평론가들이 실험하고 표현해온 형태들은 더 이상 흥미롭거나 충격적이지 않게 느껴진다.
우매하고 건방진 생각일 수도 있다. 하지만 더 이상은 조형적으로 새로움을 표현 할 수 있는 한계에 다다르는 느낌이다. 이러한 의미들은 이미 미니멀하다는 것이 우리의 삶 속에서 속속들이 사용 되고 있으며 이제 우리는 그러한 것이 미니멀한 형식들의 집합체라는 사실조차 망각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한다.
사실 무엇이 미니멀하고 모던한지 또한 혼란스러울 정도이다. 특히 입체 작품에서는 그 영역이 무한대로 발전되어 이제 미니멀하고 포스트 모던함의 포화 상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나의 작업은 미술사적 관점에서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정확히 무엇을 끄집어 내기는 모호하다. 그것은 이미 생각과 구상에 단계에서 여러번 관습적 사고와 교육,경험 등을 통해 수집한 데이터를 가지고 무엇인가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이론적으로 설명하기란 어렵다고 생각된다.
어쩌면 나는 내가 흠모하는 구조적 또는 미니멀한 형태를 빌어 스스로 세상에 말하고 싶은 형태를 제작하고 그것을 결합하여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갈 뿐이다.
그 이상의 의미는 아직 미흡한 나에게는 무리한 과제이며 그 이상의 담론을 나의 작품에 담아 설명한다면 그것은 언어의 유희이며 거짓이라 생각한다.
스페인 유학시절 담당교수였던 Doming montero 교수가 나에게 물었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현대적 작가가 되려하는가? - 그대가 젊은시절 백남준이나 폴록, 데미안, 워홀 같이 역동적인 작업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이시대의 수많은 석학들을 이해시킬만한 작업의 시대성을 가졌는가? 아니면 당신을 뒷받침 해줄 수 있는 우호적이거나 극히 비판적인 관객을 가지고 있는가? 당신에게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미치기 직전까지의 치열한 고민이 필요하다.” 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그 기억은 지금까지도 가슴 깊숙히 박혀 매순간 반복 재생된다.
그래서 항상 고민하고 도전한다. 또 무엇인가를 만들어 낸다. 시작과 끝이 보이는 시나리오로 짜여진 형태가 아니고 무한대로 이어지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여러 가지 결론들에 도달할 수 없는 혼종성이 가득한 작업을 ...
2016 작가노트
이상윤의 조각
_혼성조우, 재설정되는 관계들,
형식들, 의미들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현대조각을 연 계기가 여럿 있지만 그 중 가장 결정적인 경우로 치자면 조각에서 좌대가 사라진 점과 매스의 재고를 들 수 있다. 전통적으로 좌대는 조각을 현실과 구분해주는 근거였고, 조각이 현실과는 다른 영역과 범주에 속한 것(예술?)임을 지시해주는 미학적 장치였다. 그 미학적 장치가 사라지면서 조각은 덩달아 좌대 위에서 현실로 내려오게 된다. 현실에 속한 무엇, 현실에 연장된 무엇이 된다. 조각의 관점으로는 현실성을 획득한 것이 되고, 예술의 측면에서는 그 영역과 범주가 비현실적인 것에서 현실적인 것을 아우르게 된 것이다. 개념적인 용어로 치자면 조각에서 설치로 확장된 것이다. 그리고 매스의 재고는 이와는 또 다른 측면에서 확장을 불러온다. 매스의 재고는 무엇보다도 조형물에 구멍을 내는 형태와 경우로 나타나고, 그 구멍을 매개로 조형물의 이쪽과 저편을 통하게 함으로서 공간을 확장시킨 것이다. 조각이 설치로 확장되고, 조각을 매개로 한 공간경험을 확장시킨 것이다.
그 핵심에 현실이 있고, 현실성을 획득한 조각이 있다. 조각은 말하자면 비로소 현실에 대한 무엇이 되었고, 현실과의 관계를 따져 묻는 무엇이 되었다(그 물음이 지극해지면 레디메이드에서 보듯 현실과 조각의 구별과 차이가 사라진다. 실제로 아서 단토는 마르셀 뒤샹의 레디메이드와 앤디 워홀의 재 제작된 레디메이드에서 예술의 종말을 본다).
보다시피 그리고 알다시피 이상윤의 조각에는 하나같이 좌대가 없다. 그리고 매스를 열어 공간 확장을 꾀한 경우도 적지 않다. 조각이 현실성을 획득하면서 설치로 확장되고, 지금여기의 감각적 현실공간으로 연장된다. 현실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한 구실이 되고, 현실에서 유래한 이야기를 위한 계기가 된다. 현실적인 서사가 되고, 현실에 대한 메타포가 된다. 마치 한편의 연극무대처럼 현실적 상황을 재현하는 상황공간을 제시하는 것이 되고, 그럼 만큼 일종의 상황조각으로 범주화할 만한 한 경우의 제안이 된다. 현실에 대한 메타포와 삶의 알레고리를 지시하는 것으로서 자리매김 되는 것.
그렇게 작가의 조각에는 현실에 대한 메타포로서 길이 도입되고, 삶의 알레고리를 위해 균형 잡기가 강조된다. 이를테면 이러저런 길들이 등장한다. 굽이굽이 휘돌아가는 길이 있고, 가파른 길이 있고, 도대체 시점과 종점을 종잡을 수 없는 미로 같은 길이 있고, 다람쥐 채 바퀴 돌 듯 항상 처음으로 되돌려지는 길이 있다. 도대체 직선거리로 가닿는 길이 하나 없고, 반듯한 길이 하나 없는 것이 영락없는 지난한 삶의 여정 그대로다. 그 길 위에 그리고 그 길 끝에 동물들이 서성인다. 말과 얼룩말과 기린과 달팽이 같은(물론 이외에 다른 동물들도 있지만 대개는). 흥미롭게도 하나같이 목이 길고 다리가 긴 동물들인데, 저기 먼 곳을 지향하는(그리워하는?) 삶의 여행자들이다. 그리고 얼룩말은 위장(어쩜 삶은 위장의 기술일 수 있다)을, 그리고 달팽이는 느린 삶의 미덕을 각각 표상한다. 이 일련의 작업들에서 작가는 인간상황을 동물에 빗대어 표현하는 일종의 우의적 표현(우화)을 꾀한다. 더불어 길은 망망대해를 저 홀로 떠가는 일엽편주(실제로 작가의 조각에는 배도 있다)와 함께 가장 전형적인 삶의 메타포에 속한다(심지어 로드무비라는 영화장르가 따로 있는).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고독한 여행자를 상기시키는 길 위에 서성대는 동물형상이 시적이고 서정적이다.
그리고 균형 잡기를 위해서 작가는 상대적으로 덩치가 큰 코끼리를 도입한다. 대개는 반원 형태의 불안정한 구조물 위에서 중심잡기에 열심인 코끼리를 통해 작가는 또 다른 형태와 경우로서의 삶을 표상한다(어쩜 삶은 중심잡기 혹은 균형 잡기의 문제일 수 있다). 그렇게 작가는 동물에 빗대어 길 위에서의 삶을, 불안정한 삶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토끼인간으로
그리고 근작에서 작가는 기왕의 작업에 나타난 우의적 표현을 넘어 사물 혹은 자연과 인간을 합치시키는 경우로 작업을 확장하고 변주한다. 이를테면 구름머리 인간과 토끼인간과 같은. 먼저 구름머리 인간을 보면 말 그대로 머리가 구름으로 대체된 사람이다. 그는 깎아지른 절벽과도 같은 건물 위에 서서 소시민의 현실을 증언하기도 하고(현실주의적인. 아마도 자살?), 이념적인 차이를 중재하기도 하고(이데올로기적인), 흔히 사찰에서 보는 것과 같은 정교한 꽃문양 패턴으로 장식된 창살문을 배경으로 마치 사진이라도 찍듯 포즈를 취한다(전통적인. 채색목판을 재구성한 작업으로 조각과 회화, 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아우르는). 사람 사는 꼴이 어슷비슷해 쉽게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설득력을 얻는다. 아마도 작가의 자소상이면서 어느 정도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일 것이다.
그런데, 왜 구름머리인가. 구름머리에는 무슨 의미심장한 의미라도 담겨 있는가. 알다시피 구름은 정해진 형태가 따로 없는 것이 가변적인 삶을, 붙잡을 수 없는 형태가 덧없는 삶을 떠올리게 한다. 새록새록 피어오르는 생각을 몽글몽글한 구름에다 비유하기도 한다(생각하는 인간). 그리고 몽상적인 인간, 꿈꾸는 인간을 상기시킨다. 아마도 구름머리인간에는 작가가 생각하는 이 모든 인간에 대한 관념이 반영되고 투사된 것일 터이다. 현대인의 자화상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작가의 트레이드마크이면서 캐릭터로 봐도 되겠다.
그리고 또 다른 캐릭터가 있다. 바로 토끼인간이다. 정장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그가 거울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 옆에는 사진 스튜디오에서나 볼 법한 조명우산이 설치돼 있어서 아마도 사진을 찍는 것 같다. 거울이나 사진에 의해 뒷받침되는 것이지만, 그는 아마도 나르시스의 후예로서의 자기반성적 인간을 표상할 것이다. 그런데, 왜 토끼인가. 알다시피 토끼는 전통적으로 다산성을 상징한다. 자본주의의 경제논리로 치자면 생산성이 높다는 말이다. 생산성이 높다? 그럼 토끼인간은 생산성이 높은 현대인의 초상으로 봐도 되는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여기서 높은 생산성은 반어법으로 읽어야 한다. 말하자면 개별주체에게 높은 생산성을 강요해오는, 개별주체를 경쟁사회로 내모는, 자신의 능력을 알아서 짜내는 착취사회를 표상한다. 그리고 그 자기착취며 자발적인 착취 앞에서 한없이 쪼그라드는 현대인의 소외를 표상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인간을 도구화한다고 보고, 소외(인간이 도구가 되는 것)를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본다. 토끼인간은 이런 도구화된 인간이며 소외된 인간의 표상으로 보인다. 겉보기에 멀쩡한,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저마다 말 못할 속사정을 숨기고 있는 현대인의 또 다른 자화상으로 보인다.
이처럼 구름머리인간이나 토끼인간이 삶을 껴안으면서 비판하는(그 자체 연민과도 통하는) 풍자적 현실을 예시해주고 있다면, 또 다른 우의적 표현을 위해 도입된 고양이는 미술을 비판하고 미술사를 풍자한다. 이를테면 각각 뉴욕색면화파(바넷 뉴만?)를 연상시키는 추상회화를 쳐다보는 고양이, 오르피즘을 연상시키는 물결패턴 문양의 회화를 대면하는 고양이가 등장한다. 물을 싫어하는(실제로 그림을 경계하는) 고양이에서 암시되듯 고양이가 이런 추상회화를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다. 여기에 주변에 설치된 건물 형상으로 인해 침수된 도시를 보는 것도 같다. 회화와 조각, 입체와 평면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아우르는 이 일련의 작업들에서 작가는 순수한 형식논리에 천착한 모더니즘 회화가 예술의 자율성이며 회화의 내재율(그 자체 자족적인 존재의미)을 위해 혹 정작 중요할 수 있는 삶의 현실을 간과하거나 배제시킨 것은 아닌지, 추상미술이 도대체 삶의 현실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를 묻는다. 소위 모더니즘 패러다임에 대한 논평을 시도하고 제안한 경우로 볼 수 있겠고, 이로써 은연중 작가 자신의 현실주의적 예술 관념을 내비친 대목으로 봐도 되겠다.
혼성조우라고 부른다.
상호간 이질적인 것들이며, 외적으로 보아 무관계해 보이는 것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은다. 기하학적 형태의 추상조각과 유기체적 형태(길 위에 선 동물들, 균형 잡는 동물들), 인간과 자연(구름머리인간), 인간과 동물(토끼인간), 회화와 조각(그림을 쳐다보는 고양이), 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허물고 넘나들면서 관계를 재설정한다. 그렇게 관계가 재설정되면서 최초의 의미도 바뀐다. 의미란 그 자체 고정적이거나 결정적이지가 않다. 상황이 바뀌면 의미도 달라진다. 그래서 그 자체 고정적인 의미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상황이 의미를 낳는다(결정한다)고 보는 것이 화용론이다. 작가의 혼성 조우란 주제는 바로 이렇듯 상황, 전제, 문맥, 맥락 여하에 따라서 달라지는 의미며 가변적인 의미를 겨냥한 화용론을 상기시킨다. 의미론적으로 그렇고, 형식적으로도 조각을 확장한 경우로 볼 수 있겠다.
그렇게 작가의 조각은 길 위에 선 동물들, 균형 잡기에 열심인 동물들, 꿈꾸는 인간, 소외된 인간, 자기반성적 인간을 매개로 현대인의 초상을 예시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