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
: 끝 모를 단절과 소통의 미궁
김승환/ 조선대 교수(미술사)
서양 미술의 역사는 우리에게 미술의 기능이 얼마나 다양하게 변모해왔는지를 잘 보여준다. 풍부한 사냥감을 기원하는 주술적 기능에서, 문맹자를 위한 종교교리서, 교훈이 될 만한 역사적 사건이나 왕과 귀족의 치적, 덕망을 기록하여 보여주는 역사교과서, 아름다운 풍경과 이국적 정취를 담아내는 사진의 역할 등에 이르기까지 미술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그 자신 본연의 심미적 기능 이외에도 실로 여러 가지 기능을 수행해 왔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20세기 미술은 이러한 실제적이고 부차적인 기능을 모두 벗어버리고 미술 자체만의 순수하고 고유한 영역을 찾고자 하는 움직임으로 이해되어질 수도 있다. 이러한 다양한 기능과 함께 공존해 왔으며, 또한 20세기 미술의 움직임 속에서도 변함없이 지속되어 오는 기능 ― 모든 예술이 공유하는 기능이기도 하지만 ― 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상상력을 자극하거나 정서의 울림을 통해 현실에 지친 우리를 위로하거나 보다 나은 세계를 꿈꾸게 하는 기능이다. 다시 말해, 미술은 그 시각적 즐거움을 넘어 우리에게 멋진 세상을 꿈꿀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부여한다. 세태가 각박하게 돌아가는 시대일수록, 미술가의 삶이 고단할수록 이러한 경향의 미술이 나타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 것 같다. 80년대의 광주민주화운동을 눈앞에서 직접 체험하고 90년대의 외환위기를 영국에서 뼈저린 내핍으로 보내야 했던 작가 최 재영은 미술을 통해 어떤 세계를 꿈꾸는가?
최재영의 미술 세계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인간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다. 1990년대 영국에 체류하면서 만났던 지구촌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담아낸 <얼굴> 연작이나 인간의 보편적 희로애락의 정서를 표현한 <포옹> 연작, 2004년 ‘소우주로서의 인체’를 유비적으로 보여준 <꽃> 연작은 작가의 변함없는 인간에 대한 호기심과 함께 ‘욕망’과 ‘관계’에 대한 천착을 드러낸다.
<포옹> 연작의 초기 작업에서는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 <무동>을 배경으로 포옹하는 인물들이나 런던 도심을 배경으로 포옹하는 인물들이 주를 이룬다. 2004년에서 2006년에 작업된 <포옹> 연작은 부조 작업을 통해 다양한 형태로 포옹하는 인물을 선보이는데, 초기 작업과 달리 특정한 시간과 공간이 제거되어 있다. 몇몇 영국 비평가들(샤롯 홀릭, 셰인 웰트너)이 지적하듯, 최재영의 <포옹> 연작은 분단된 한반도의 많은 이산가족의 좌절에서 출발하여 인류의 보편적인 이별과 갈망에 대한 포옹으로 귀착하고 있다. .
조지아 오키프를 좋아하는 작가답게 최재영은 <꽃> 연작을 통해 다양한 인간의 욕망을 형상화했다. 방사형 꽃잎의 복잡한 구조를 통해 작가는 우리 사회의 끝 모를 욕망, 미궁에 빠진 욕망을 보여주고 있다. 작가는 꽃 그림을 통해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우주와 생명의 신비’, ‘생생하고 찬란한 에너지’, ‘인간적인 사랑’으로 규정되길 염원했다.
이번 전시회를 통해 작가 최재영은 <포옹>과 <꽃>의 연작에서 부분적으로 다루었던 ‘관계’의 문제에 온전히 침잠한다. 이러한 작가의 관심은 이번 전시회의 주제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작가는 이를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과 단절의 문제로 그려내고자 한다. 모노톤을 기조로 그려진 <관계> 속의 인물들은 무언지 모를 이유로 긴장한 듯 하고, 한편으로 우수에 잠긴 듯하다. 감은 눈과 빈 눈동자, 가린 입은 소통의 쉽지 않음을 보여주는 반면, 몇몇 군상은 굳은 포옹을 통해 단절을 뛰어넘고 있다.
작가는 인물들의 긴장과 욕망, 희로애락을 단색조의 그라데이션 기법을 통해 극적으로 연출하고 있다. 또한 인물들을 윤곽선보다는 음영과 농담을 강조하는 몰골법을 통해 표현함으로써 전체적으로 분명한 명암대비 속에 드러낸다. 그 결과, 감상자는 판화나 삽화, 포토몽타주의 재미마저 맛볼 수 있다.
뜨거운 ‘포옹’으로 욕망과 갈등을 뛰어넘어 하나가 되는 지구촌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려왔던 작가 최재영은 <관계> 연작을 통해 또 다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고독, 단절과 좌절을 넘어 화해와 소통, 희망과 사랑을 꿈꾸고 있다. 작가의 인간에 대한 성찰과 회화적 탐구는 우리에게 끝 모를 단절과 소통의 미궁으로부터 행복한 땅으로 향하는 가냘픈 빛을 던져주고 있다.(200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