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서운 얼굴 이모 크랙에이엠 대표 정 은  2003년 아일랜드 코크(Cork)에서 작가 윤지선을 처음 만났다. 나는 당시 어학연수를 하고 있었고 윤 작가는 유럽 배낭 여행 중이었다. 그녀는 마치 수 백 개의 용수철이 머리에서 곧 튀어나갈 듯한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었고 풍기는 아우라 덕에 심상치 않음을 느끼긴 했지만 사실 그녀가 예술가를 업으로 삼고 있다는 것은 한참 후에야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20대의 나는 상대방의 직업이나 나이 따위는 관심 밖이었고 그냥 사람이 좋아 함께 즐기고 어울리던 시절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가 지나고 그녀가 아일랜드를 떠나기 전 작별 인사로 남긴 엽서를 통해 나는 그녀의 작품을 처음 접했다. 엽서에는 신체(손, 털이 숭숭 난 다리)를 이용한 사진 작품이 인화되어 있었고, 그 사진은 야릇한 상상력을 마구 자극해 부끄러움과 짜릿함을 동시에 느끼게 했다. 솔직히 그녀가 엽서에 쓴 내용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엽서 속 작품은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다. 관심이 있다면 그녀의 이전 작업을 꼭 한 번 찾아보기를 권한다. 탯줄을 연상시키는 긴 장갑(작가의 어머니와의 공동 작업), 하나의 포즈를 취하기 위해 작가가 수십 시간을 요가에 투자하여 만들어낸 아크로바틱한 포즈 사진, 드릴로 작은 구멍을 뚫어 자신의 털을 심은 동물 뼈, 조상의 초상화(윤두서)에 자신의 털을 심은 작품 등 그녀의 작품 들은 때때로 사람들의 불편함을 자극하지만 윤지선적 유머가 있고 유희가 있다.  2014년 나는 미국으로의 이주를 앞두고 있었고 그녀에게서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Rag face와 관련한 이메일을 영어로 써 달라는 부탁이었다. 단순히 이메일 작성만 하면 끝날 줄 알았던 일이 예상 외로 점점 커져 이듬해 우리는 뉴욕 첼시에서 미국 첫 개인전 Rag face를 성공적으로 치러냈다. 그것이 우리의 첫 협업이었다. 이후에도 Rag face는 사진(Photography), 섬유(Textile), 초상(Portrait), 컨템포러리(Contemporary) 아트 등을 주제로 한 여러 전시에 초대되었고 덕분에 나는 네덜란드, 프랑스, 헝가리, 오스트리아 등을 여행하는 호사를 누렸다. 우리는 출장 업무가 끝나면 반드시 그 나라의 유명 미술관을 방문했고 그녀는 작품과 작가에 대한 이야기 보따리를 흔쾌히 풀어 내주었다. 대학교에서 강의를 했던 경험 때문인지 그녀는 예술을 전공하지 않은 나의 눈높이에 맞추어 작품과 작가의 시대적, 역사적 배경과 그에 얽힌 스토리를 맛깔스럽게 이야기해주었다. 하루의 절반 이상을 작업에만 몰두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세상과 단절된 똥고집 작가이겠거니 지레 짐작했던 나의 편협한 생각은 이 여행들을 통해 사라졌다. 결혼과 육아로 나를 잊고 살고 있던 나에게 그녀와의 여행은 인생의 활력이 되어 주었고, 예술은 어렵고 특정인들을 위한 것이라 생각했던 편견을 깨기 충분했다. ‘저 사람, 가면을 썼다’ 라는 말은 흔히 부정적인 의미로 쓰여진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에게는 사실 여러가지 얼굴이 존재한다. 사랑하는 이를 바라볼 때, 먹고 싶지 않은 음식을 억지로 먹을 때, 오랜 동안 바라왔던 일이 이루어졌을 때 우리의 얼굴 표정을 상상해보라. 사랑, 분노, 행복, 걱정, 기대, 멸시, 창피, 공포 등 우리는 오만 가지의 감정을 가지고 있고 이에 따라 우리 얼굴 표정도 바뀐다. 어쩌면 가면을 많이 가진 사람일수록 자기 표현에 충실한 사람이 아닐까? 작가 윤지선의 Rag face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잊고 있었던 감정들이 하나씩 떠오르게 된다. Rag face 속 작가의 얼굴은 보통의 자화상과는 다르게 정면을 정확히 바라보고 있지도, 억지로 멋진 표정을 지어 보이지 않는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본연의 감정과 표현에 충실할 뿐이다.  작가는 자신의 얼굴 표정을 사진으로 찍어 광목천에 현상하고 후에 공업용 재봉틀로 얼굴 사진 위를 박음질한다. 윗실과 아랫실의 색을 달리하여 마치 물감이 섞이듯이 실의 질감과 색감이 혼재하고 얼굴 표정은 원래부터 그랬던 것인지 바느질로 인해 생겨 난 것인지 순서를 알아차리기 어렵다. 작품은 이러한 작업 과정을 통해 자연스레 앞면과 뒷면이 동시에 생겨난다. 앞과 뒤는 같은 얼굴이지만 다른 얼굴이기도 하다. 마치 내가 모르는 나의 얼굴을 발견할 때처럼 말이다. 표정도 다르고 면의 질감과 색감도 다르다. 앞뒤를 동시에 감상할 수 있다는 점은 작가와 관객의 아날로그적 상호작용을 가능케 한다. 관객은 작품의 원하는 면만 골라 감상할 수 있고 공중에 걸어 앞과 뒤를 동시에 감상할 수도 있다. 관객의 물리적, 정신적, 감정적 환경에 따라 작품을 감상하는 과정에 관객의 의지가 개입될 수 있다는 것이 Rag face의 매력이다. 이 매력을 100% 느끼기 위해 나는 그녀의 작품을 반드시 직접 보라고 권하고 싶다. 전시 공간에 들어가는 순간 느껴지는 압도적 흡인력은 인스타그램의 정사각형 사진으로는 절대 느낄 수 없다. 한 올의 얇은 실이 수천 수백만 번의 재봉질을 통해 면이 되고, 그 면이 다시 쌓이고 쌓여 묵직한 캔버스를 창조해낸다. 면과 면의 경계를 구분하는 바느질의 모양새는 그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던 기법이다.  나의 두 아이들은 작가 윤지선을 ‘무서운 얼굴 이모’라고 부른다. 아이들이 어릴 때 Rag face를처음 보고 윤작가에게 붙여준 별명이다. 그들에게 Rag face 첫인상은 무서움이었지만 이제 아이들은 작품에서 우스꽝스러움을 찾아내기도 하고, 슬픔을 느끼기도 하며, 얼굴 표정을 따라해 보이기도 하며 작품을 즐긴다. 나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작품 속에 점점 나이 들어가는 작가의 얼굴도 보이고, 가끔은 엄마의 얼굴, 그리고 나의 얼굴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질 때도 있다. 처음 작품을 마주쳤을 때의 느낌과 지금은 차이가 있고, 아마도 앞으로도 변화해 나갈 것이다. 마치 새로운 사람을 만나 알아가는 과정처럼 말이다. 이는 아마도 그녀의 작품에는 관객이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서사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작가는 관객이 Rag face를 통해 작가 의도를 파악하거나 ‘이거 작가 얼굴이래!’ 라고 단정짓지 않기를 바란다. 작가의 의도가 어찌되었건 관객이 ‘밸 꼴리는 대로’ 바라보고 있는 그대로 느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작품을 관람하는 여정에서 평소에 소홀했던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사상 유래 없던 팬데믹이 전 세계를 강타한 이후 우리는 벌써 세번째 봄을 맞이하고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지나고 있는 지금, 우리는 평범했던 일상과 여행을 갈망하고 있다. 다음 번에 다가올 봄은 지금보다 나아지기를 소망하며 마스크로부터 자유로운 Rag face를 통해 조금이나마 위안을 얻기를 바래 본다. < 갤러리 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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