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은 비록 조각을 전공했지만, 조각가는 아니다. 그가 종이에 수채화, 캔버스에 유화를 즐겨 그렸다고 해서 화가도 아니다. 그가 작품에 사용한 돌, 쇠, 나무, 흙 등을 재료를 잘 다룬다고 해서 그를 장인이라고 부를 수도 없다. 그러니 그를 조각가라고 말할 수고 없고 화가라고도 말할 수 없으며 다양한 재료들을 실험하고 탐구하는 장인이라고도 말할 수 없으리라. 조각과 회화 다양한 재료의 사용에 능통한 공병을 지칭할 때 가장 포괄적인 의미로 ‘그냥 작가’라고 해야 적절할 것이다.

러던 그가 지금은 아크릴에 ‘필’이 꽂혔다. 아크릴판은 색깔로 분류하자면 투명, 반투명, 불투명으로 간단히 나눌 수 있지만, 공병 작가는 투명한 15~30mm 굵기의 아크릴판을 주로 이용하고 있다. 그가 투명한 아크릴판을 사용하는 이유는 ‘투명은 빛의 집‘이기 때문이며 비교적 두꺼운 아크릴판을 애용하여 평면적인 작품에 입체성을 부여하려는 속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가 이제까지 해왔던 삼차원적 조각과 이차원적 캔버스 작업의 다정한 만남이 작품들 속에 녹아있다.

병 작가는 스스로 특수하게 제작한 드릴로 갈고, 찍고, 파고, 깨어내고, 그으면서 아크릴판의 속살을 더듬고 만지며 두드리며 견고한 그것의 껍질을 찬찬히 연다. 열어서 찍을 때는 찍음이 빛, 파낼 때는 파냄의 빛, 깨어 낼 때는 깨냄의 빛, 그을 때는 그음의 빛을 탄생시킨다. 물론 망치나 끌 같은 다른 다양한 연장도 빠질 수가 없다. 그러나 그는 아크릴판에 밑그림을 그려 작업하지 않는다. 할 수도 없다. 작업하는 순간 그것은 금방 사라지기 때문이다. 직관적 사유와 감각과 노련한 기술, 예술가적인 고뇌와 경험의 치열함이 그것을 대신한다. 단 한 번의 잘못된 찍음이나 스침과 파냄은 그 작품의 고유한 의도를 순식간에 파괴한다. 드릴의 RPM이 분당12,000회나 되기 때문이다. 작업을 할 때면 아크릴은 화학성의 독특한 냄새를 풍긴다. 드릴의 칼날에 떼어진 아크릴의 조각과 먼지는 작가의 공업용 마스크와 보호경, 작업복을 순식 간에 덮는다. 아크릴은 가차 없이 자신의 부서진 공간에 빛을 깃들게 한다.

럼 왜 빛인가. 공병 작가에게 빛은 무엇인가.
종교나 신화, 민속에서 빛은 신성함, 경이, 아름다움, 신비, 에너지 생명의 탄생 등의 상징이다. 왕과 성인들은 빛나는 곳에서 탄생한다. 그래서 빛은 신성하고 고귀하고 높다. 빛은 사악을 몰아낸다. 빛 속에 있는 더러움은 없다. 빛이 없는 곳은 죽음이고 불모다. 아침이 희망인 것은 빛이 어둠을 몰아내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은 근원은 빛에서 출발한다. 빛을 당당히 받아들일 때 우리는 미망에서 깨어난다. 빛은 정신의 계몽이기도 하다. 그래서 빛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이다. 바르게 살겠다는 의지와 생활, 어두운 주변을 비추어 주겠다는 선한 욕망이 빛 속에 있다. 우리는 진, 선, 미에 속한 사람을 빛에 있다고 말한다. 공병 작가는 한 조각 한 조각 떼어낸 아크릴에서 빛을 탄생시킴으로써 자신이 스스로 이러한 ‘빛’이 되기를 서원한다. 우리는 공병 작가의 작품을 보면서 빛의 신성함과 황홀함에 경이와 찬탄을 하면서 ‘빛의 사람’이 되기 위한 설레는 감동을 준비한다. 그래서 공병의 작품은 심미적이며 영혼적
이다.

술은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미술에서 윤리나 도덕을 논하는 것은 무리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공병 작가의 작품 곳곳에서 포효하듯 내뿜는 빛과 강렬하게 수렴하는 빛을 마주하면 장엄한 신성함이 우리의 몸에 스며드는 것을 체험한다. 문득 우리가 범할 수 없는 거룩한 장소와 영원의 시간에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약동하는 생명감이 온몸을 엄습하고 감싼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빛과 같은 사람’이 되리라 결심한다.

상의 모든 것들은 생로병사의 노정(路程)에 있다. 다시 말하면 생명과 죽음, 생성과 소멸, 처음과 끝, 모임과 흩어짐의 무상성(無常性)에 있다. 그러나 빛은 죽음보다는 생명, 소멸보다는 생성, 끝보다는 처음, 흩어짐보다는 모임과 친하다. 공병 작가의 작품 속에서 ‘숭고의 아우라’와 함께 심미적영혼의 아름다움을 느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