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얻을 때까지이 공정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어떤 이가 ‘벽화기법’이라 이름 붙인 까다로운 노동집약적 작업을 거쳐 비로소 남다른 화면의 깊이가 만들어진다. 화가의 말대로 그림의 피부는 농사꾼의 손등처럼 거칠고 투박하다. 도대체 얼마나 깊이 고민했을까. 얼마나 많은 붓질이 필요했는가. 미술 세계의 언저리를 기웃거리면서 어쭙잖은잡문으로 밥벌이하며 사는 나는 그 간단치 않은 과정이 주는 무게와 번민을 쉽사리 가늠하지 못한다. 위기가 왜 없었겠는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그림을 그리는가. 예술은 대체 내게 무슨 의미인가. 이런 고민을 끌어안고 방황했다. 산으로 들로 정처 없이 떠돌았다. 그러던 그에게 손 내밀 어준 건 다름 아닌 고향이었다. 화가는 남도 끝자락 목포에서 태어나 유달산 기슭에서 놀며 자랐다. 남종화의 대가이자 호남화파의 거목이었던 남농 허건許楗, 1907~1987의 자취가 서린 고향 목포에서 화가는 비로소 깨달았다. 자기 삶의 원천은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체득한 자연환경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것을. 화가로 산다는 것은 영혼을 흔드는 그 유산들로부터 나만의 것을 거르고 걸러 화폭에 표현해내는 일임을. 숱한 실험과 도전을 통해 화가가 마련한 출구는 바로 ‘진경산수' 였다. 지금은 맥이 끊겨버린 전통 청록산수화 채색 기법을 화가가 끊임없이 연구하고 발전시켜온 까닭은 자명하다. 우리 한국화의 정체성 회복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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