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남 흔적’으로 모색하는 육화(肉化)의 형상과 키아즘 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I. 프롤로그 누구에게나 ‘페르소나(persona)’는 있다. 그리스 어원으로 ‘가면’을 의미하는 이것은 ‘가면을 쓴 외적 인격’을 가리킨다. 융(C. G. Jung)의 관점에서 페르소나는 존재자의 그림자와 같은 ‘무의식의 열등한 인격’일 따름이지만, 원래 신학에서 페르소나는 이성적인 본성을 지닌 독립적 실체로 간주되었다. 그러한 점에서, 페르소나는 삼위일체로서의 하나님처럼 ‘존재자의 위격(位格)을 부여받은 또 다른 존재자’로 기능해 왔다. 오늘날에 이것은 천사, 악마, 의인화된 동식물, 무의식 속 자아처럼 한 인간이 관계를 맺은 모든 소통의 대상이자, 투사된 또 다른 자아를 의미하는 것으로 확장되어 사용된다, 작가 박예지에게 있어 ‘말(馬)’은 소통의 대상이자, ‘자신이 투사된 또 다른 자아’인 페르소나로 간주된다. 무수한 용접봉이나 철선을 이어 붙여 만든 ‘말 조각’을 통해서 그녀가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글은 그녀의 작업이 지닌 조형 언어와 그것이 함유한 관계의 메시지와 미학이 무엇인지 살펴본다. II. 관계 맺기 혹은 관계 연습 박예지의 작품 속에서 ‘말’은 ‘내가 투사된 또 다른 나’, ‘무의식의 세계로부터 건져 올린 나’라는 점에서, 일련의 페르소나이자, 자기와 동일화한 ‘메타포(metaphor)’로 자리한다. 여기서‘은유’로 해석되는 메타포는 “A는 B와 같다”는 ‘직유’와 달리, “A는 B다”는 식의 어법으로 상이한 차원의 ‘원개념과 보조 개념’을 서로 연결한다는 점에서 의미의 전이(轉移)와 전화(轉化)를 촉발한다. 즉, 박예지의 작업에서 ‘말’이라는 원개념은 ‘나’라는 보조 개념으로 전이된다. 실제로 박예지는 작가 노트에 작업의 주제인 ‘말’을 “저 자신이면서 또 다른 타인의 모습, 그러니까 뭐든 인간의 마음”이라고 기술한다. 그러니까 박예지에게 있어, 말이라는 원개념은 나, 타자, 인간의 마음이라는 보조 개념으로 전화를 거듭하는 셈이다. 유념할 것이 있다. 메타포의 전략은 양자가 별 개연성 없는 상태에서 ‘이질적인 것의 동일화’를 느닷없이 실행하는 까닭에 매우 강렬한 비유의 효과를 가진다는 점이다. 그것을 우리는 ‘창의적 메타포(creative metaphor)’ 혹은 ‘메타포의 창의성(creativity of metaphor)’이라 부르곤 한다. 이러한 창의적 메타포의 속성은 문학이나 미술에서 더욱더 강렬한 비유의 효력을 지닌다. 박예지의 작업에서 ‘말’은 ‘외형적 유사함’이 그다지 없는 ‘박예지’와의 사이에서 ‘이질적인 동일화라는 느닷없는 사건’을 벌이면서 ‘창의적 메타포’ 로서 강렬한 비유의 효과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물론 이 비유의 강렬한 효과는 ‘경험의 유사성’ 속에 있는 관람자를 초대하면서 가능해진다. 즉, 긴 다리와 목, 날렵한 몸매와 같은 ‘형식적 유사성’ 보다, 인간과 가까운 수태 기간을 지닌 온순한 초식성의 동물이자 십이지의 친근한 동물과 같은 ‘내용적 유사성’으로 메타포를 이끄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박예지에게 있어 ‘말’은 관람자와의 상호작용을 성취하게 만드는, 블랙(Max Black)이 언급하는, ‘암시적 복합체(implicative complex)’ 로서의 메타포가 되기에 족하다. 박예지의 작가 노트에서 살펴보았듯이, 말은 그녀이기도 하지만, 관람자이기도 하고, 모든 인간이기도 하는 ‘암시적 복합체’로서 ‘의미의 전이’를 거듭하면서 인간과의 사이에서 ‘관계 맺기’를 지속한다. 페르소나가 ‘투사된 또 다른 자아’이고 메타포가 ‘유사성이 없는 두 개의 대상을 직접적으로 연결하는 비유’라고 할 때 그녀의 작업에서 원개념과 보조 개념 그리고 주체와 타자 사이의 관계 맺기는 지속된다. 가히 그녀의 작업을 이러한 관계 맺기를 모색하는 ‘관계 기록’이나 ‘관계 연습’ 혹은 ‘관계 연습에 대한 조형 실험’이라고 부를 만하다. III. 우연과 필연 혹은 ‘만남 흔적’ 작품을 보자. 얇디얇은 스테인리스 스틸 봉들을 용접으로 이어 붙여가며 다양한 유형의 ‘말’을 형상화하는 박예지의 작업은 관계 맺기라는 주제 의식을 지속적으로 조형화한다. 여기에는 다양한 관계 맺기의 방식이 실행된다. 첫째, 스테인리스 스틸의 용접봉의 가느다란 몸체를 서로 병렬로 이어가면서 용접을 통해서 접합을 시도하는 동종 동형의 사물이 실행하는 ‘관계 맺기’다. 밋밋하고 가느다란 용접봉은 작가의 의도에 따라 휘거나 잘리기도 하면서 말의 형상을 만들어 나가는데, 주요한 것은 ‘불을 일으키는 용접’의 방식을 통해 서로의 몸을 녹이면서 하나가 되는 관계 맺기를 지속한다는 것이다. 사물을 불로 녹여 훼손하면서 또 다른 사물과 만나는 용접의 방식은 마치 인간의 관계맺기를 유추케 한다. 한 주체가 타자와의 만남을 지속하는 인간의 만남을 생각해 보라. 나의 손해와 상처를 보듬어 안고 타자에 대한 신뢰와 애정을 바탕으로 관계 맺기를 지속하지 않는한 인간의 만남은 실패를 자초할 뿐이며, 신뢰의 인간관계는 애초부터 무의미해진다. 때론 인내하기에 버거울 만큼 상처가 커서 타자와 싸움을 벌이며 서로에게 생채기를 남기기도 하지만, 인간관계 속 이러한 상처의 흔적은 타자를 더욱더 이해하게 만들면서 서로의 인간관계를 돈독하게 만든 ‘만남 흔적’으로 작동한다. 박예지의 작업 속 용접봉이 불에 녹아 일그러진 채 서로를 보듬어 안고 있는 상흔(傷痕)은 그러한 점에서 인간의 ‘ 만남 흔적’으로 은유된다. 둘째, 박예지의 조형 언어라는 것이 일정의 형태의 구조적 틀을 미리 만들고 그 뼈대 위에 살을 메우고 피부를 덮는 과정으로 작업하기보다 점과 점을 잇고 선과 선을 잇는 과정으로 점차볼륨을 키워가는 관계 맺기를 실행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그녀의 작업은 거시적 관계 맺기의 틀 안에서 미시적 관계 맺기를 시도하기보다 미시적 관계로부터 거시적 관계로 점차적인 관계 맺기의 과정을 성취해 나간다고 하겠다. 이러한 방식은 반(反)건축적 조형 태도와 맞물린다. 건축이 기본적으로 ‘거주를 목적으로 하는 유용성과 견실한 구조적 공간의 구축’을 지향한다면, 박예지의 작업은 무엇보다 ‘순수 예술 창작을 목적으로 한 심미적 가치의 조형’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그녀의 조형 태도는 일정 부분 ‘건축학의 구축’과 달리 ‘고고학의 발굴’과 같은 태도를 견지한다. 즉 눈에 보이는 거시적 틀을 먼저 제시하는 건축학과 달리 눈에 보이지 않는 미시적 세계를 추적하기 위해서 유적지에 눈금을 매겨놓고 순차대로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격자식(grid method)발굴법과 같은 고고학의 태도 말이다. 따라서 그녀는, 건축이 지향하는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필연적 구조’에 매달리기보다 고고학이 지향하는 ‘우연이 낳은 필연의 구조’를 추적해 나가는 방식을 자신의 창작으로 견인한다. 그것은 마치 초현실주의의 ‘무의식적 자동 작용’으로 풀이되는 ‘오토마티즘(automatisme)’처럼 우연의 효과를 폐기하지 않고 지속하는 것과 같다. 그녀는 스테인리스 스틸 봉들이 서로를 만나 관계 맺기를 지속하는 가운데 발생하는 무수한 우연의 형상과 만남의 흔적을 보듬고 그것이 유인하는 다음 단계의 필연적 만남을 상상하면서 오토마티즘에 자기 몸과 마음을 맡긴다. 박예지의 이러한 조형 태도는 자연스럽게 ‘인간의 삶’으로 은유된다. 그녀의 작가 노트를 보자: “삶의 어설픔으로 하나둘 쌓아 올린 세월이 조금씩 단단하고 깊어진다. 예측할 수 없는 삶의 무게는 우연의 연속처럼 부서지고 다시 만들어진다.” 그렇다. 철을 녹여 반복적으로 마음 가는 대로 쌓아 올리는 그녀의 오토마티즘 조형 언어는 마치 인간의 삶처럼 사람과의 우연의 ‘만남 흔적’ 속에서 필연에 이르게 한다. IV. 육화(肉化)의 형상과 키아즘 박예지가 ‘우연한 만남의 무수한 집적’을 통해서 형상을 찾아 나선 까닭일까? 그녀의 작품은, 해부학적 골격과는 상이한 뒤틀린 말의 형상을 만들거나 간신히 자기 몸을 지탱하는 기이한 구조를 선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말의 기이한 형상을 기다란 세 개의 다리로 지탱하게끔 만드는 방식이 그것이다. 머리와 꼬리는 없고 몸통이 덩그러니 그 다리를 연결하고 있는 형상은 매우 초현실적이다. 수북한 목덜미의 갈기가 바람에 흩날리는 듯한 형상, 거미처럼 기괴하게 자라난 다리를 지닌 말의 형상, 달리기나 도약을 시도하고 있는 기묘한 형상, 말의 앞뒤를 구분할 수 없이 몸통이 연결된 형상 등도 그러하다. 가느다란 다리와 그것이 지탱하는 몸통의 관계 맺기는 진즉 미시적 세계의 우연적 만남으로부터 시작해 예측할 수 없는 필연적 만남으로 스멀스멀 자라난다. 그래서일까? 박예지의 작품은 기마상에 천착했던 마리노 마리니(M. Marini)의 말 조각처럼 단순, 고졸(古拙)한 가운데 역동적 면모를 선보이거나, 때로는 큐비즘과 초현실주의를 오가는 자코메티 (A. Giacometti)의 거친 표면의 기다란 인물 조각처럼 기이하고 우울하다. 그뿐인가? 그녀의 작품은 마티스(H. Matisse)의 인체 조각처럼 간결하며 루이즈 부르주아(L. Bourgeois)의 거대한 거미조각처럼 기괴하지만, 역동적이기도 하다. 생채기를 남긴 표면 질감이 전하는 처연함, 해부학을 탈주하는 위태로운 구조가 전하는 아슬아슬함 그리고 그것들이 한데 어울려 전하는 역동성을 한 몸에 지닌 박예지의 작품은 그래서 아름답다. 무엇인가 우울하고 기묘하지만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 아름다움이라고 할까? 필자는 박예지의 말을 형상화한 작품들을 ‘육화(incarnation, 肉化)’의 과정이자 결과물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신학에서 ‘성육신(成肉身)’으로 해석되는 이것은, 그리스도 성육신의 예처럼, “신적인 존재가 인간의 육체 안으로 들어와서 인간 가운데 거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메를로-퐁티(M. Merleau-Ponty) 식의 현상학에서 이 ’육화‘는 ’의미가 그것을 표현하는 물질에 내재해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즉 ’의미‘는 ’물질’의 우연적 배열 속에서만 생겨나는 것으로, 물질이 의미를 실현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에게 있어 ’육화한 실존‘이란 ‘인간 실존의 의미가 인간의 살(chair)에 내재하는 상태’이자 ‘인간 살의 우연적 배열 속에서 의미가 발현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퐁티의 관점으로 보자면, 박예지의 작품 속 스테인리스 스틸 봉은 육화를 위한 기본 물질로서, ‘사물의 살(chair des choses)’의 우연적 배열을 통해서 의미를 발현하는 물질’이 되는 셈이다. 그녀의 작품 속 육화는 형식상으로는 차가운 금속이 따스한 피가 흐르는 말이라는 동물 형상으로 전화된 것이며, 내용상으로는 ‘키아즘(chiasma)’을 실행한 사건이자 그 결과물이기도 하다. ‘교차’로 번역되는 키아즘은 퐁티의 관점에서 주체가 만나는 다양한 객체와의 상호 작용 혹은 수평적 관계 맺기의 미학을 선보인다. 키아즘은 정신/신체, 나/타자, 대자/즉자의 대립을 수평화한다. 키아즘은 보기-보이기, 지각하기- 지각되기, 능동-수동이 교차하는 세계이다. 즉 키아즘이란, 작가 박예지가 “말에는 내 자신이며, 타인이며, 세상의 모든 것이 녹아 있다”고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나의 세계와 타인의 세계와의 다양한 공립(共立) 불가능성을 통해 그 통일을 형성하는 세계"인 것이다. V. 에필로그 글을 마무리하자. 필자가 메를로 퐁티의 ‘육화’와 ‘키아즘’의 개념으로 살펴본 박예지의 관계 연습은 여전히 실험을 거듭하는 중이다. 그녀는 ‘말’이라는 주제와 소재를 ‘투사된 또 다른 자아’인 페르소나이자 동시에 ‘유사성이 없는 두 개의 대상이 만나는 비유’인 메타포로서 대면하면서 만남의 관계학을 실행하는 중이다. 나-작품-관객-타자-사물-세계와의 ‘관계 맺기’를 말이다. 그녀가 ‘통하여(à travers)’를 전시 주제로 내세운 적이 있었듯이, 박예지는 그동안 ‘말을 형상화하는 조각’을 ‘통해서’ 자신과 자기가 몸담은 세계를 오늘도 다각도로 성찰해 왔다. 박예지는 그동안 말 머리만을 습작처럼 지속해서 다양한 조형 실험을 거치거나, 철판 위에 용접봉을 올려서 용접을 통한 관계 맺기를 변주하거나, 말의 표면을 회화적 질감으로 만드는 다양한 실험을 시도해 왔다. 또한 말의 몸통을 일부 비워 투과체의 조각으로 만들기도 하고, 조각이 드리우는 그림자와의 관계를 탐구하면서, 작품들을 연극적 무대 위에 올려놓은 듯 설치를 변주하는 조형적 실험을 선보이기도 했다. 9회째가 되는 이번 개인전에서 박예지는 더 본질적인세계에 깊이 천착한다. 이전까지 ‘말의 형상을 통하여’, ‘나-타자-세계와의 관계 맺기’에 골몰해 왔다면, 이번 전시에서는 ‘24개의 마음을 담은 그릇 형상을 통해서’, ‘나-사물-세계와의 관계 맺기’를 실험한다. ‘채우고, 비우고’ 라는 주제를 내세운 이번 전시에서, 박예지는 용접봉을 용접으로 이어 붙여가며 바닥으로부터 구불구불 몸체를 만들어 나간 작은 그릇 작품들을 선보인다. 작업 과정에서부터 한 땀 한 땀 점 용접을 시작으로 선 용접을 전개하고 이것을 다시 2차원의 면과 3차원의 입체로 확장하는 까닭에 창작에 있어서 지난한 노동력과 인내 그리고 집중력은 필수적이다. 그래서일까? 작품명은 ‘명상(Meditation)’이다. 용접봉이라는 조각의 기초적 질료인 사물로부터 출발해서 그릇이라는 예술적 사물을 만들기까지, 용접봉이 자기 몸을 다른 것들의 몸과 함께 녹여 관계 맺기를 지속하는 지난한 노동의 작업은 차라리 명상에 가깝다. 마치 백팔번뇌를 하며 고통 속에 자신을 던져 명료한 정신의 세계에 이르고자 하는 명상처럼 말이다. 이번 개인전에서도 우연으로부터 필연으로 이어지는 ‘관계 맺기’, 미시적 관계로부터 거시적 관계로 이어지는 ‘관계 맺기’는 지속된다. 특히 반복적인 용접의 방식으로 구체(球體)에 가까운 그릇 만들기에 집중했던 이번 전시의 출품작들은 ‘무수한 차이의 반복’을 낳으면서 좌우대칭이 완벽한 시메트리(symmetry) 구조가 아닌 달항아리와 같은 애시메트리(asymmetry)의 그릇 형상을 선보인다, 삐뚤삐뚤한 구조와 형상이지만 우리는 거기서 작가의 지난한 노동과 명상이 남긴 ‘육화의 형상’과 ‘키아즘의 내용’을 읽어낼 수 있다. 말의 다양한 형상 탐구라는 이전의 조형 실험으로부터 그릇이라는 단순한 형상에 집중하는 이번 전시는 그녀의 작업이 함유하고 있던 육화와 키아즘의 본질에 더욱더 깊이 잠입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겠다. 관계 맺기 혹은 관계 연습이라는 주제에 관한 본질적 세계와 심리적 차원에 더욱더 깊이 성찰한 이번 전시는 그녀의 작업이 품은 관계의 메시지와 미학이 무엇인지를 유감없이 선보이는 기회가 될 것이다. < 갤러리 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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