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향수와 동경의 틈새에서 펼쳐지는 풍경 경기대교수, 미술평론 박 영 택  캔버스 천에 유채물감을 이용해 그림을 그린 역사는 서구 르네상스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벽면에 그려진 프레스코 회화와 목판에 템페라, 유채 등으로 그려지다 이후 건축물/벽으로부터 독립되면서 이동이 가능하며 크기가 자유로워진 캔버스에 당시의 어떤 물감들보다도 정교한 재현술이 가능한 유채로 그려진 유화는 이후 서구미술에서 가장 강력한 회화 매체가 되었다. 그로인해 캔버스 천과 그 사각형의 프레임은 세계를 담아내는 유일한 창이 되었고 유채물감은 그 창을 통해 바라본 대상을 재현하는 매우 효과적인 재료가 되었다. 정보화시대와 여러 영상매체가 압도되는 지금도 유채물감의 그 같은 지위는 여전한 편이다. 물론 유채물감은 더 이상 재현의 수단에만 종속되지 않고 추상화 내지 물질성 자체를 극대화하는 한편 이질적인 물질들과 뒤섞여 다양한 존재감을 드러내면서 적극 연출되고 있다. 그것은 재현의 수단인 도구로서의 물감이자 동시에 모호한 질료이고 오브제이며 매혹적인 색이자 낯선 물질이기도 하다. 물감이 지니고 있는 다양한 존재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풀어헤친 역사가 바로 현대미술이었음도 기억해볼만하다. 그것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조인주는 캔버스 천의 앞면이 아니라 뒷면을 바탕으로 삼아 그 위에 직접 그림을 그린다. 젯소칠을 하지 않은 천, 코팅 처리를 하지 않은 뒷면은 천 본래의 색감과 질감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바탕인 동시에 그림에 또 다른 색채, 물질성을 안겨주면서 자리한다. 표면에 거친 표면 효과와 두꺼운 피부를 안겨주는, 돌가루가 합성된 아크릴성 물감인 젤스톤이 우선적으로 밀착되어 올라가면서 이루어진다. 두툼하고 견고하게 작가가 의도하는 모래의 질감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며 건축물의 외부 표현에 더없이 적합한 재료를 이용해 빽빽하게 들어찬 여러 건물들의 외관을 표현하고 있다. 개별적인 건물들의 묘사이기도 하지만 그것들을 우선적으로 물질로 인지시키고 있다. 물감이 여러 건축물 각각의 표면의 차이, 질감들의 상이성을 가시화하는 한편 개별 건물들이 지닌 피부의 촉각적인 성질을 은연중 감촉시켜주는 차원에서 동원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시각에 의존되는 회화를 다분히 신체적으로, 통감각적으로 전이시켜주는 편이다. 물론 그 물질감은 그 위에 칠해진 물감/색채에 의해 화려하고 다채롭게 표면이 마감되어서 집들로 가득 찬 풍경화로 이내 수렴된다. 조인주의 그림은 물감으로만 그려진 그림들과 달리 실제 건축물의 표면을 연상시키는 견고한 질감, 그 두툼한 물질성을 깨물고 있는 색채와 무수히 많은 건물들을 세밀하게 그려 여러 볼거리를 안겨주는 점에서 상당히 재미있고 흥미로운 효과를 발생시킨다.  작가가 그린 풍경은 도시의 여러 건물을 소재로 한 것이지만 동시에 상상해서 연출한 그림이다. 화면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는 온갖 집과 길, 간판, 그리고 그 사이에 박힌 몇 그루의 나무, 자동차와 사람들이 작게 그려져 있다. 흰색으로 단호하고 선명하게 마감된 길과 하늘을 제외하고는 온통 집들로 채워져 있는 풍경이다. 이것은 실재하는 풍경이 아니라 작가에 의해 상상된 풍경이자 여러 풍경의 조각들이 재구성되고 콜라주 된 풍경이다. 구체적인 현실계의 장소에서 출발하면서도 이를 자유롭게 가공하고 그림 안에서 환상적으로 펼쳐 낸다. 지상의 현실계가 소음과 번잡함을 지우고 낭만과 꿈의 장면으로 치환하며 등장하는 그림이다. 원경으로 포착된 이 풍경은 바닥에서 수직으로 균질하게 일어서있고 동시에 수평으로도 줄을 이어 연결되어 있다. 원근이 부재한 화면에는 모든 집들이 저마다 동등하고 평등하게 펼쳐져 있다. 다양하면서도 공평한 존재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면서 풍경을 만들고 각자의 존재감을 자존감 있게 지키고 있다. 집들이 이 세상의 주인공이 되어 스스로의 얼굴을 세우고 있는 모습이자 사람들을 대신해 저마다 다채로운 생의 모습을 화사하게 드러내고 있는 듯도 하다. 제각각의 건물들은 그만큼 다양한 색상과 재질을 지닌 지붕과 벽, 그리고 창문과 발코니, 작은 화분과 간판, 차양 등을 거느리면서 서로 어깨를 맞대고 공존하고 있다. 그것들이 또한 사람들 간의 공생을 연상시키는 동시에 무수한 집/사람들마다 지닌 여러 생의 사연을 기술記述하는 듯하다. 아마도 작가는 이 상상의 풍경, 집들이 모여 이룬 가상의 장면을 통해 모종의관념화된 이상적인 공동체 내지 자신의 심상에 자리한 추억의 도시/동네에 대한 향수 내지는 기억을 아름답고 화려하게, 동화적이고 환상적으로 그려보이고자 하는 욕망인 것 같다.  향수와 추억에의 동경은 스카프를 쓴 측면의 소녀/젊은 여자의 얼굴을 그린 또 다른 그림에서 보다 여실히 드러난다. 이런 소재의 그림은 2013년도 개인전 도록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동일한 소재지만 근작에서는 사실적인 묘사에서 다소 벗어나 있다. 스카프를 보다 강조하고 그 내부에 집들이 밀집한 풍경을 흡사 스카프의 문양처럼 그려넣은 점이 큰 차이다. 여자의 측면 얼굴은 부분적으로만 드러나 있고 눈은 지긋이 감겨 있다. 아울러 얼굴 부분을 의도적으로 뭉개서 흐릿하게 지워놓았다. 이 흐릿한 윤곽은 사라진 시간, 모호한 추억과 기억, 안타까운 열정 등을 의미할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스카프의 내부는 여러 건물들이 가득 들어차있고 그만큼 다채로운 색상과 묘사로 화려하고 현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아마 이 풍경은 소녀의 잠재된 무의식 혹은 기억 안에 깃든 장소, 풍경이상과 낭만, 동경 등에 대한 소환이나 강렬한 그리움을 강조하는 듯싶다. 앞서 언급한 작가의 도시 풍경, 화려한 색채와 다채로운 묘사. 장식성이 높고 두드러진 질감의 강조 속에 연출된 그림들도 그런 맥락에서 출현한 것이리라. 따라서 스카프를 쓴 소녀의 얼굴 그림에서 얼굴과 스카프 안의 풍경과의 대비는 불가피해 보인다. 그것은 아마도 사라지는 시간과 지난 시간이 머금고 있는 기억 사이에서, 향수와 동경의 틈새에서 가득 펼쳐지는, 지워지지 않는 풍경들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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